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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일 옛 대구형무소 터에서 4.3당시 대구형무소 수형희생자를 위한 진혼제가 4.3도민연대 주최로 열렸다. | ||
지난 2일 인천시 남구 학익동 옛 인천소년형무소 터에서 4.3당시 인천소년형무소 수형희생자를 위한 진혼제가 4.3도민연대 주최로 열렸다. | ||
"그때 난 18세였는데 아버지와 짚을 일다가 순경한테 잡혀갔어. 안덕지소, 서귀포경찰서 등지서 달포씩 두들겨 맞고 10년형 받았지. 뭣 때문인지 몰라"
"여기가 정문이야. 확실해. 내가 문틈으로 저기 저 산을 바라보던 기억이 나. 그땐 엄지손가락 두 개를 철사로 묶어 짐짝 옮기듯 이리저리 옮겨 다니고 그랬어"
형무소 옛 터를 찾자 수감생존자들 사이에서 격앙된 증언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당시 갓 소년티를 벗을 정도의 어린 청년이었던 이들이 60년을 돌아 다시 그곳을 찾았다.
지난 2000년부터 매년 전국 4·3유적지를 순례 해온 '제주4·3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도민연대'(이하 4·3도민연대·공동대표 김평담, 김용범, 윤춘광, 양동윤)가 지난 31~2일 4·3수감자 생존자 7명과 함께 대구형무소·인천소년형무소 등을 찾아 제주4·3희생자들의 영면을 바라는 진혼제를 올렸다.
이날 참가한 생존자들은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수감자들. 당시 인민군에 밀리던 한국군이 남하하며 복역자들을 총살시키던 중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역전되면서 살아난 경우가 대부분이다. 사형집행이 자신의 앞방에서 멈춘 경우도 있었다.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삶을 송두리째 잃어버렸지만 다시 역사의 소용돌이로 인해 목숨을 건진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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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일 옛 대구형무소가 있던 대구시 중구 삼덕동에서 술과 고사리, 옥돔, 귤, 빵 등 제주음식을 정성껏 올린 진혼제가 봉행됐다. 4·3사건 발발이후 대구형무소에 위령제가 열린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조촉이 타오르자 생존자들은 '그 때'의 고통이 떠오르는 듯 눈시울을 적셨다.
대구형무소는 4·3당시 불법재판으로 15년이상의 형량을 선고받은 사람들이 복역했다.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에 따르면 당시 대구형무소에는 제주4·3사건 관련 재소자 200여명을 포함한 4000여명이 수감돼 있었고 이들 중 1402명이 1950년 7월중 군에 인계, 대부분 경산의 코발트 광산이나 가창골에서 학살된 것으로 조사됐다. 이중 제주4·3관련 재소자는 142명이었다.
이날 진혼제에는 당시 대구형무소에 수감됐던 김영주(조천읍 선흘2리·86)·양규석(안덕면 화순리·86)씨를 포함한 수형생존자들과 4·3도민연대, 4·3연구소 관계자 등 30여명이 참가했다. 생존자들은 이 자리에서 당시를 회상하며 생생한 4·3의 증언을 쏟아내기도 했다.
4·3도민연대는 2일 2008 전국 4·3유적지 순례 일정을 마치는 자리에서 지속적인 4·3진상규명을 촉구하는 결의문을 채택, 발표했다.
4·3도민연대는 결의문을 통해 "정부의 4·3진상조사보고서는 4·3희생자 수를 2만5000~3만여명으로 명시하고 있으나 지금까지 4차에 걸친 희생자 신고자는 1만5000여명에 불과하다"며 "지속적인 4·3진상규명사업 재개, 4·3역사현장 보전사업 시행, 추가 4·3희생자 자진신고기간 연장" 등을 정부에 강력히 요구했다.
한편 4·3도민연대는 1일 대구형무소에 이어 2일 당시 인천소년형무소가 있던 인천시 남구 학익동을 찾아 진혼제를 올린 뒤 이날 제주로 돌아왔다. 4·3도민연대는 순례기간 부산·마산·마포형무소 옛 터를 방문하기도 했다. 대구·인천=문정임 기자 mungdang@jem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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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쌀하지만 하늘은 구름한 점 없이 청명했던 10월의 마지막 날인 31일 오전 9시, 제주국제공항 3층 출발 대합실에는 제주4.3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도민연대(공동대표 김평담, 김용범, 윤춘광, 양동윤)가 제주4.3사건 60주년을 맞아 2박 3일의 일정으로 추진한 '2008 전국 4.3유적지 순례' 참가자들이 하나둘 씩 모여들기 시작했다.
1948년 4.3당시, 젊은 나이에 영문도 모른 채 경찰과 군인 등에게 끌려가 불법 군사재판을 받고 전국의 형무소로 보내져 고통의 삶을 살았던 '4.3 수형 생존인'들. 이런 이들이 60년 전, 악몽과도 같던 그날의 현장을 직접 방문해 어렵사리 그 고통의 기억을 되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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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 만의 4.3과 동행'이라는 주제로 진행된 이번 순례는 말 그대로 수형 생존인들이 60년 만에 처음으로 직접 고난을 겪었던 현장인 부산, 마산, 대구, 인천, 마포 형무소를 방문, 이들의 기억을 듣는 형식으로 진행돼 그 의미를 더했다.
공합대합실에서 본 수형생존인 5명은 다소 어둡고 담담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벌써부터 그 때의 악몽이 생각나는 듯 했다. 하지만 먼저 떠난 보낸 옛 동무들을 60년 만에 다시 만난다는 생각에 감회 또한 새로운 듯 했다.
이렇게 순례단은 기대반, 걱정반의 심경을 드러내며, 전국 4.3유적지 첫번째 순례지인 '부산 형무소' 터로 떠났다.
#"요강 위로 올라간 뒤, 작은 철장으로 밖을 볼 수 있었죠"
순례단이 첫 번째로 방문한 곳은 부산광역시 서구 동대신동에 위치한 '부산형무소 터'. 이 곳은 1896년 9월 일본군 수비대가 연병장으로 사용하다가 1909년 10월 21일 부산 감옥소가 들어서게 됐다.
이어서 1923년에는 부산감옥소가 '형무소'로 이름이 바뀌었다. 부산 교도소로 이름이 바뀐 이 곳은 1973년 부산 사상구로 교도소를 옮기게 되고, 1975년 이 자리에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면서 형무소의 흔적이 없어졌다. 이 아파트는 옛 형무소 터에 들어섰을 당시, 형무소 터라는 선입견이 있어 분양이 오랫동안 지지부진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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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가, 그는 갑자기 아파트 맞은 편에 있던 '부산 대청산'을 가르치더니, 옛 형무소의 위치를 기억한 듯 형무소 수형 당시의 이야기를 쭉 풀어놨다.
"우리 감방에는 30명이 한 방에서 생활했어요. 우리는 일반 수감자와는 달리 노역이나 운동도 못했고 하루종일 깜깜하고 좁은 감방에서 지냈어요. 빽빽하게 사람들과 부딪히면서 살았는데, 옷이 땀으로 다 젖고 땀냄새도 고약했어요. 또, 몇일 지나니깐 굶거나 전염병 등으로 죽는 사람이 많았아요..."
그는 또 당시 감방에 있던 요강 위로 올라가 작은 철장 사이로 '대청산'을 봤다고 했다. 그리고 이 작은 철장 구멍으로 그는 수감자들이 차량에 물건처럼 내팽겨지는 모습을 봤다고도 진술했다.
"감방에 요강 하나가 있었는 데 그 위로 올라가면 작은 철장 사이로 밖을 볼 수 있었어요. 그 때 저 산(대청산), 이름은 모르겠지만 저 산을 봤어요...그리고 그 구멍으로 사람을 던지면서 트럭에 싣는 모습을 봤는데, 한 간사가 '죽이러간다'라는 말을 하는 것도 들었어요. 그 이후 그들이 총살로 죽었다는 이야기가 소문으로 돌기 시작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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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안듣는 송아지 처럼 끌려다녔어요...너무 무서워죠"
'부산 형무소 터'에서 김영주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잠시 멈추고, 두번째 순례 장소인 '마산 형무소 터'로 이동해 그의 못다한 이야기를 듣는 시간을 가졌다.
두번째로 방문한 곳은 경남 마산시 오동동에 위치한 '마산 형무소 터'. 이곳은 1910년 7월 1일 부산감옥 마산분감으로 설치돼 들어섰다가 1946년 마산형무소로 승격됐다. 마산형무소가 '마산 교도소'로 이름이 바뀌면서 1970년 마산교도소는 마산시 회성동으로 자리를 옮기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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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 곳 지역 주민들은 '마산 형무소'는 주차장 뿐 만 아니라 뒷 쪽에 있는 천주교 마산 교구청과 그 앞의 삼성생명 빌딩을 포함한 모두가 형무서 터라고 했으며 현재 터 흔적을 알리는 비석의 위치는 정문에서 한참 비껴난 곳이라고 말했다.
이 곳에서는 '옛 부산 형무소'에서 못다한 김영주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듣는 시간이 마련됐다. 김 할아버지는 어린시절 영문도 모른 채 끌려오게 된 사연에 대해 하나씩 토로하기 시작했다. 이야기를 하다가 당시 상황이 생각났는지, 다소 흥분된 격조로 말하기도 했다.
그의 가족은 1949년 당시, 제주시 조천읍 선흘리에서 목장일을 했다고 했다. 그는 집에 있으면 군인들이 다 잡아간다는 소문을 듣고, 군인과 경찰들을 피해 산으로 올라가 몸을 숨겼다. 그러다가 군인에게 잡혀 주정공장터(현 제주항 맞은편 공터) 창고에 갇히게 됐다. 이 후 불법 군사재판을 받게 됐고, 형량도 모른채 배를 타고 어딘가로 끌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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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대구와 부산 형무소에서는 일반 수감자와는 달리 노역과 운동 등을 할 수 없었지만, 마산에서는 피혁노동으로 구두를 제작하면서 살았다고 했다. 억울하게 끌려와서 이같은 생활을 하고 있었지만, 그는 꼭 살아야겠다는 마음이 컸다고 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제주에 보고싶은 가족이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이곳에 잡혀왔을 때가 27살이었어요. 결혼을 일찍한 내게는 아내와 사랑스런 딸 하나가 있었죠. 너무 보고싶어서 많이 울기도 했어요. 가족들 때문이라도 살아야겠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구두기술을 배우게 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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