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企者不立(기자불립), 跨者不行(과자불행)"
"企者不立(기자불립), 跨者不行(과자불행)", '까치발을 하고서는 오래 서 있지 못하고, 가랑이를 한껏 벌려 보폭을 너무 크게 하면 제대로 길을 걸을 수 없다'는 말로 시작하는 노자 <<도덕경>> 제24장을 읽을 차례이다. 우리의 부자연스러운 행동이 그 자체의 구조에 의하여 오래 지속될 수 없다는 것을 지적한 좋은 문장이다.
진득하게 앉아서 기다리지 못하고 벌떡 일어서고 일어서는 것으로 부족해 발꿈치를 든다. 발꿈치를 들면 빨리 보고 많이 알 수 있으리라 기대하지만 결코 오래 서 있을 수가 없다. 또 보폭을 넓혀서 한꺼번에 성큼성큼 앞으로 빨리 나아가려고 한다. 몇 걸음은 실제로 빨리 나아가지만 계속 그렇게 걸어갈 수가 없다. 까치발과 큰 걸음은 사람에게 일종의 착시효과를 준다. 처음에 많고 빠른 결과를 가져올 뿐인데 그 과정이 지속된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물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 까치발을 하고 큰 걸음으로 걷는 것이 낫다. 하지만 그것은 언 발에 오줌 누기처럼 순간에만 통할 뿐 그 다음에 여전히 막막할 뿐이다.
좀 더 높이 서겠다고 발끝으로 서는 것은 자연스런 행동이 아니다. 그런 부자연스런 행동으로서는 단단히, 오래 서 있을 수 없다. 멀리 가겠다고 다리를 한껏 벌리고 가려고 하는 것도 자연스런 행동이 아니다. 그런 부자연스런 행동으로는 멀리, 오래 갈 수 없다. 모든 부자연스런 행위를 버리는 것이다. 이런 부자연스런 일로서는 본래의 의도에 역행하는 결과만 불러 올 뿐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자연의 지배를 받는다. 자연은 부자연스러운 인위의 행동을 그 자체의 조화의 법칙에 의하여 차단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 초조해 하지 말고, 일상에서 조급증을 덜어내고 싶다. 오히려 마음을 비우고, 자중하며 일상을 행복하게 향유하고 싶다. 하루 주어진 일을 성실하게 해 나가는 것이다. 누구나 행복을 원한다. 행복의 기준은 저마다 다르지만 모두 행복한 삶을 꿈꾼다. 그러나 학교에 입학한 순간부터 시작된 경쟁과 적자생존의 논리는 사회생활에서도 이어졌고 지금껏 우리들의 하루하루를 만들어 가고 있다. 물론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 치열하게 사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다. 경쟁을 통해 내 안에 잠자고 있던 가능성이 십분 발현되기도 하고 발전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경쟁을 통한 성취를 최우선시하는 사회에서는 소소한 일상의 행복을 누릴 여유가 허락되지 않는다. 행복지수가 높은 나라의 국민의식을 조사한 자료를 살펴보면 행복하기 위해 거창한 무언 가가 필요한 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은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으며 '남 보란 듯이' 살지도 않는다.
비우고 덜어내 텅 빈 고요함에 이르면, 늘 물 흐르듯 일상이 자연스러워질 것이다. 그런 사람은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낼 뿐 포장하지 않으며, 순리에 따를 뿐 자기 주관이나 욕심을 고집하지 않을 것이다. 그 결과 그의 모든 행위는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항상 자유롭고 여유로울 것이다. 샘이 자꾸 비워야 맑고 깨끗한 물이 샘 솟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만약 비우지 않고, 가득 채우고 있으면 그 샘은 썩어간다. 물질보다는 마음의 여유를, 전체보다는 개인의 가치를 존중한다. 남보다 빨리 갈 필요도 없다. 조금 느릴지라도 꿈을 향해 살아갈 수 있는 삶, 경쟁에 밀릴까 조급해 하지 않아도 되고 꿈을 이루기 위해 남을 밟지 않아도 되는 삶이 진정으로 행복한 삶이 아닐까?
이 장을 읽다 보니, <<구약성서>> "시편" 제 1편을 1절이 소환된다. "복되어라. 악을 꾸미는 자리에 가지 아니하고 죄인들의 길을 거닐지 아니하며 조소하는 자들과 어울리지 아니한다." 이 말을 좀 쉽게 풀어 본다.
(1) 그는 범죄자들과 나쁜 일을 도모하는 일에 동참하여 걷지(walk) 않는 사람이다.
(2) 그는 죄인들이 가는 길에 서 있지(stand) 않는 사람이다.
(3) 그는 남을 중상모략 하는 자리에 있지(sit) 않는 사람이다.
다시 말하면, 그걸 다음 같이 '안 하기'를 하는 거다.
(1) 공동체를 음해하는 일을 도모하는 일에 참여하여, 그들과 함께 행동하지 않는다. 한 마디로 범죄자들과 어울려 다니지 않는 것이다. 그런 곳에 걷는 일(walk), 즉 행동하지 않는다.
(2) 도덕적으로 타락한 인간들이 하는 삶의 스타일을 따라 그 안에 서 있지(stand) 않는다.
(3) 자신이 모르는, 만나본 적도 없는 사람을 중상 모략하고 시기하는 자리에 앉아 남을 헐뜯는데 앉아(sit) 시간을 보내지 않는다. 여기서 앉아 있는 다는 건 자신의 몸에 베어, 자신이 그런 줄도 모르고 지내는 수동적인 삶의 모습에 앉아 안주(安住)하는 사람이다. 탈 영토 화하여, 건너가기를 끊임 없이 시도하여 관계를 확장해 나가는 길 위에 서야 한다.
이를 위해, 우리는 매일 다음과 같은 세 가지를 묵상해야 한다.
(1) 나는 오늘 내가 가야할 길을 잘 걷고 있는가?
(2) 나는 오늘 어울리지 말아야 할 사람과 함께 서있지 않는가?
(3) 나는 오늘 남의 불행을 즐거워하는 자리에 앉아 안주하고 있지 않는가?
이런 '안 하기'를 위해서는, 내가 나도 모르게 하는 생각, 말 그리고 행동을 제3자가 되어 관찰할 수 있어야 한다. 여기서 노자의 '무위(無爲)'가 소환된다. '무위'는 부자연스럽게 인위적으로 일을 하지 않으려 하는 거다. 그런데 '무위이불무위(無爲而不無爲)'라 했다. "무위하면 되지 않는 법이 없다"는 뜻이다. 이 문장을 단지 이렇게 해석하면 부족하다. 세상사에서 어떤 욕망도 품지 않고, 그냥 되는 대로 흘러가게 내버려 두는 것을 '무위'로 보면 부족하다. 노자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무위'보다도 '되지 않는 일'이 없는 '무불위(無不爲)의 결과였다고 본다. '무위'라는 지침은 '무불위'라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를 가진다. <<도덕경>> 제22장을 보면 안다. "구부리면 온전해지고, 굽으면 곧아질 수 있고, 덜면 꽉 찬다. 헐리면 새로워지고, 적으면 얻게 되고, 많으면 미혹을 당하게 된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노자를 구부리고, 덜어내는, 헐리는, 적은" 것만으로 받아들이려 한다. 사실 노자는 온전하고 꽉 채워지는 결과를 기대하는 마음이 더 컸다.
'안 하기'를 하면, 그 결과가 좋다는 말이다. 노자가 말하는 '무위'는 아무 것도 안 하는 상태가 아니라. 그것은 우주의 순환이나 사계절의 변화와 같이 정교한 원칙의 표현이다. 또한 '무위'라는 말은 '일을 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라, 상대가 과중하게 느낄 정도로 행동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지나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무위'는 정교한 '인위(人爲)'이다. '무위'는 오랜 연습과 훈련, 시행착오와 수정, 혹독한 자기 점검과 자기 변화를 거쳐 도달하게 되는 '세렌디피티(serendipity)'이다. 이 말의 사전적 의미는 '운 좋은 발견', '재수 좋게 우연히 찾아낸 것'이다. '세렌디피티'는 자신의 만의 보물을 찾아 나선 사람에게 우연히 주어지는 선물이다. 그 보물을 찾기 위해 애쓰지 않는 사람에겐 그런 행운이 찾아 올 리가 없다. 그런 행운이 찾아온다 할지라도, 자신의 그릇이 마련되지 않아, 금방 사라질 것이다. 그것이 불행이다.
바람이 전하는 말/최서림
이제 그만 납작 엎드려 민들레로 살라 하네.
몸 안에 공기 주머니를 차고 방울새로 살라 하네.
부딪히지 말고 돌아서 가는 물로 살라 하네.
위벽을 할퀴고 쥐어짜듯 아픈 새벽
유리창을 두드리며 바람이 일러주는 말,
비우면 채워지고 비우면 채워지니 강물처럼 살라 하네.
물새 똥 앉은 조약돌처럼 구르고 구르면서 살라 하네.
노자 <<도덕경>> 제 24장 읽기를 계속한다. 스스로 드러내려고 하는 것, 스스로 옳다고 하는 것, 스스로 자랑하는 것, 스스로 으스대며 뽐내는 것 등도 모두 자연스런 일이 아니다. 따라서 우리가 이런 일을 하면 할수록 우리의 본래 의도와 반대되는 결과만 거두게 된다. 스스로 드러내려고 하기 때문에 드러나지 않고, 스스로 옳다고 하기 때문에 멸시를 당하고, 스스로 자랑하기 때문에 한 일이 모두 허사로 돌아가고, 스스로 잘난 체하기 때문에 무시를 당한다. 그러나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아야 밝게 드러나고, 스스로를 옳다고 하지 않아야 돋보이게 되며, 스스로 자랑하지 않아야 한 일이 허사로 돌아가지 않게 되고, 스스로 뽐내지 않아야 오래갈 수 있다는 역설의 논리가 성립된다는 거다.
그래 노자는 이렇게 말한다. "自見者不明(자견자불명) 自是者不彰(자시자불창) 自伐者無功(자벌자무공) 自矜者不長(자긍자부장), 스스로 드러내는 사람은 밝지 않고, 스스로 내세우는 사람은 돋보이지 않는다. 스스로 자랑하는 사람은 공로를 인정받지 못하고, 스스로 으스대는 사람은 공이 오래가지 않는다." 다음과 같은 역설의 공식이 성립한다는 거다.
自見→不明(자견→불명): 스스로 자신을 드러내거나, 자신의 관점으로 보는 것
自是→不彰(자시→불창): 자신을 옳다고 하는 것
自伐→無功(자벌→무공): 자신을 드러내는 것
自矜→不長(자긍→부장): 자신을 내세우는 것
체하는 삶, 허례 허식으로 가득한 삶, 위선적인 삶은 무엇보다도 우선 본인을 고달프게 한다는 사실을 곧 알게 된다. 남에게 잘 보이려고 안간힘을 쓰고, 뭔가 보여 주겠다고 큰 소리를 치고, 뭔가 자기만 옳다고 외쳐 대고, 뭔가 자기만 위대하다고 거들먹거리고, 언제나 남의 눈치를 봐야 하고, 남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신경 쓰고, 남과 자기를 비교하고, 겉과 속이 다른 행동을 하고, 이렇게 온갖 애를 다 쓰는데도 기대한 만큼 좋은 결과는 커녕 오히려 남의 비웃음만 사고 만다. 이를 만회하기 위해 더욱 잘난 체하고, 목에 힘주고, 그러기에 더욱 남의 빈축을 사게 된다. 이런 악순환이 계속되고, 그러다가 결국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삶이 불가능한 삶, 그저 끊임없이 남과 비교하면서 사는 '비교급 인생'으로 전락하고 만다. 차분하고 홀가분한 삶의 담백한 맛을 모르고 사는 비참한 삶이 된다는 거다.
"자견", "자시", "자벌" 그리고 "자긍" 그런 것들은 모두 설거지 통에 버려질 음식 찌꺼기이거나 몸에 난 종기 혹은 할 필요 없는 군더더기 행위와 같은 것들이라 말한다. 왜냐하면 자연의 원칙과 너무나 거리가 먼 행위 방식들이기 때문이다. 자연의 존재 원칙 속에서는 어떤 것도 "자기 자신"으로 확보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없다. 모든 것의 존재 근거가 다 반대편 것과의 관계 속에 스며들어 있다. 이렇게 되어 있는 자연 속에서 자신만의 유한한 체계를 가지고 그것을 옳다고 고집하거나, 배타적으로 확보된 자신을 내세우는 것과 같은 행위는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밖에 없다고 보는 것이 노자의 생각이다.
노자는 이걸 이렇게 말한다. "其在道也(기재도야) 曰餘食贅行(왈여식췌행) 物或惡之(물혹오지) 故有道者不處(고유도자불처), 도의 입장에서 보면, 이런 일은 먹다 남은 밥이나 군더더기 행동으로 모두가 싫어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도를 깨우친 사람은 그러한 데 처하지 않는다."
도를 아는 사람은 위에서 말한 일들이 모두 "밥찌꺼기"나 "군더더기" 같이 쓸데없는 일이라는 것을 깨달은 자이다. 남이 칭찬한다고 키가 한 치 더 커지는 것도 아니고, 남이 비난한다고 몸이 가려워지는 것도 아니다. 구태여 자신을 과시하여 남의 인정을 받으러 하거나, 멸시를 피하려 하는 모든 인위적이고 가식적이고 작위적인 행동이 결국은 부자연스럽고 거추장스러운 일임을 아는 것이다. 따라서 도를 아는 사람은 이런 일에 연연 해하지 않는다. 남이 칭찬을 하거나 오해하여 비난을 하는 데 신경 쓰지 않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자기에게 주어진 삶을 소박하고 충실하게 그리고 묵묵히 살아 갈 뿐이다. 단순하고 꾸밈이 없는 삶이 가져다 주는 자유를 느리며 살아가는 거다.
다음은 <<도덕경>> 제24장의 원문과 번역이다.
企者不立(기자불립) 跨者不行(과자불행), 까치발로 서면 제대로 서있을 수 없고, 보폭을 너무 크게 하면 제대로 걸을 수 없다.
自見者不明(자견자불명) 自是者不彰(자시자불창) 自伐者無功(자벌자무공) 自矜者不長(자긍자부장), 스스로 드러내는 사람은 밝지 않고, 스스로 내세우는 사람은 돋보이지 않는다. 스스로 자랑하는 사람은 공로를 인정받지 못하고, 스스로 으스대는 사람은 공이 오래가지 않는다.
其在道也(기재도야) 曰餘食贅行(왈여식췌행) 物或惡之(물혹오지) 故有道者不處(고유도자불처), 도의 입장에서 보면, 이런 일은 먹다 남은 밥이나 군더더기 행동으로 모두가 싫어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도를 깨우친 사람은 그러한 데 처하지 않는다.